성령의 밤—“오 해피 데이”가 멈추지 않던 눈물
어느 주일 저녁, 한국 유학생 예배가 신대원 강의실에서 열렸다. 준비 찬양이 시작되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는데, 눈을 감는 순간 내 인생의 장면들이 영화처럼 펼쳐졌다.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배우던 어린 날, 교회를 떠난 사춘기, 남산을 넘어 집까지 걸어오던 발걸음, 갈보리교회에서의 결혼, 필리핀으로 온 유학길, 국립대 편입이 막혀 잔디밭에서 울던 날….
그 모든 장면 위로 밝은 빛이 비치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지, 내가 널 기다리고 있었단다.”
주님은 내가 교회에 있을 때도, 방황하던 때도, 늘 내 등 뒤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그 밤, 나는 회개의 눈물과 감사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아내도 함께 울었다. 함께 예배하던 이들은 갑자기 벌어진 눈물바다에 영문을 몰랐지만 그래도 성령님의 역사에 함께 기도해 주었다.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며 알게 되었다. 웨슬리 신학이 말하는 성령의 두 번째 역사, ‘온전 성결’의 은혜였다. 그 후로도 한동안 우리는 예배 때마다 눈물과 콧물을 훌쩍이며 곤란을 끼치곤 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부르심의 확증—커뮤니케이션 사역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님이 나를 사역의 길로 부르셨음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오래 교회 다닌 것도 아니었고, 필리핀에 온 것도 영어 공부 때문이었다. 머릿속에는 여전히 브로드웨이에 대한 꿈이 있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가 내 마음의 우선순위를 뒤집었다. 아내가 공부하던 신대원에는 ‘기독교 커뮤니케이션(MA in Christian Communication)’ 학과가 있었다. 방송과 미디어로 복음을 전할 사역자를 세우는 과정이었다. 당시로선 세계적으로도 드물었다.
2대 총장 페어뱅크스 박사가 세웠고, 아태지역 미디어센터장 덕 플레밍 선교사가 담당했다. 플레밍 선교사는 내 연극 전공과 방송국 경험을 알고 큰 관심을 보였다.
어느 날 우리 부부를 집으로 초대해 식사하며 말했다. “형제님, 하나님이 이곳까지 인도하신 것이 우연이 아닐지 모릅니다. 앞으로 선교에 미디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이 주신 은사를 복음의 도구로 쓰도록 부르고 계실 수 있어요. 함께 기도해 봅시다.”
그 제안은 내 마음 깊은 곳을 울렸다. 내가 배운 것과 경험한 것이 복음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싹텄다.
두 아이의 탄생과 잠시 귀국
그 사이 큰아이 이현, 둘째 민기가 태어났다. 나는 독학사를 마치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다. 이현이는 6월생이라 방학 동안 한국에서 출산하고 곧바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민기도 6월생이라 비슷한 계획을 세웠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2년의 유학생활로 모아 두었던 돈이 바닥났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부부가 동시에 대학원을 다니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본가와 처가 어느 쪽에서도 재정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워 우리는 기도하며 뜻을 구했다. “일 년간 한국에서 일하며 재정을 준비하라.” 하나님이 주신 답이었다. 처가에서 머물기로 하고, 나는 화정의 SLP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자리를 얻었다.
상암동교회—교단과의 첫 연결
2001~2002년 사이였다. 한국에서의 그 일 년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지냈던 시간처럼 내게도 뜻밖의 광야 학교였다.
먼저, 한국에서 나사렛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우리가 민기를 낳고 신대원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은 서성용 전도사가 자신이 사역하던 상암동교회를 소개했다. 우리는 감사히 출석했고, 담임 신민규 목사에게 우리 사연과 장래의 소망을 나누었다.
신목사님은 우리의 간증을 격려해 주셨고 신앙생활을 돕는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한국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사렛교단 교인이 되었다. 훗날 국제선교부로부터 파송받을 때, 상암동교회는 든든한 후원교회가 되었다.
영어학원에서의 혹독한 훈련
둘째로, 하나님은 내게 ‘언어 훈련’을 허락하셨다. 필리핀에서 2년 살며 시험 준비도 하고 독학사로 영문학 학사를 땄지만, 영어는 여전히 높은 산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원어민 영어학원으로 보내셨다. SLP는 서강대에서 시작한 학원으로, 수업을 전부 영어로 진행해야 했다. 아침 9시부터 유치원 7세 반 담임, 오후엔 초등반을 맡아 하루 8시간 영어로 가르쳤다.
원어민 강사 7명, 한국인 강사 7명 사이에서 일하며 나는 7개월 만에 교수부장까지 맡았다. 심지어 원장님은 서대문에 새 지점을 내면 부원장으로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결국 그 제안을 정중히 사양하고 우리는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또 배웠다.
다시 신대원으로—예비하심을 뒤돌아보며
한국에서 일 년을 보내고 APNTS로 돌아왔을 때, 나는 하나님이 그 시간을 단지 돈을 벌게 하시고 둘째를 키우게 하시고 교회를 다니게 하시려는 뜻만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영어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훈련되어 있었다. 하루 8시간, 영어로만 아이들을 가르쳤던 현장 자체가 최고의 언어 학교였다. 그 덕분에 대학원 과정과 논문을 빠르게 마치고 1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에 박사과정을 마치고 선교사가 되어 신대원에서 교수로 강의하게 될 수 있었던 기초가, 바로 그 일 년의 ‘혹독한 훈련’ 속에 다 준비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인도하심 앞에 고개가 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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