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the personal page of the Kwons in mission work

제1장. 하나님의 손끝에서 빚어진 이야기

할머니의 기도로 시작된 길
  전에 호주 선교보고를 갈 일이 있었다. 그때 나를 픽업해 주셨던 한 선교사님께서 뜬금없이 물었다. “선교사님은 모태신앙이에요?” 나는 별생각 없이 “아니요, 부모님들은 원래 신앙이 없으셨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다 잠시 생각하고는, “그런데 함께 사셨던 할머니께서 신앙이 좋으셨으니 엄밀히 따지면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믿음은 없었지만, 할머니의 기도를 통해 자랐으니 모태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라고 덧붙였다.

  그 선교사님은 깔깔 웃으며 “의외네요. 전 선교사님이 믿음 좋은 장로님 집안에서 자라난 줄 알았어요.”라고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 곱씹어 보다가 나도 웃음이 났다. “칭찬이지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라고 답했고, 또 한 번 전혀 기대하지 못한 길로 이끄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묵상하게 되었다.

  선교 보고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 선교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다. 내 신앙과 사역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기대하지 못한 것들을 기대하게 하신(Expect the Unexpected) 예수님과의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여정의 시작은 우리 가정의 신앙의 본이셨던 할머니에게서 비롯되었다.

보광동 골목길, 어린 날의 기억
  할머니는 전북 익산에서 나름 유지로 불리던 권씨 집안에 시집을 가셨다. 그러나 소실 신분이었기에 떳떳이 내세울 처지는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무척 사랑하셨지만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다. 당시 큰고모를 낳으셨고, 태중에는 아들인 내 아버지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할머니는 그 동네에서 홀로 살기 어려워 이북으로 이사하셨다.

  그러나 그곳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결국 1·4 후퇴 때 남하하는 무리를 따라 거제도까지 내려오셨고, 잠시 의지할 남자를 만나 막내 고모를 낳으셨으나 다시 혼자가 되셨다. 마침내 세 아이의 손을 잡고 서울로 상경하셨다.

  아버지는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공부를 잘해 대학을 꿈꾸었지만, 전쟁통에 거제도에서의 학사 기록이 어긋나 대학 진학이 막혔다. 집안 형편상 대학은 언감생심이었고,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자청했다.

  그 사이 충남 공주에서 상경한 어머니를 만나 가정을 꾸리셨다. 누나와 나를 연년생으로 낳으셨고, 서울살이는 녹록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계란 장사, 쌀 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부모님은 늘 새벽같이 우유 배달을 나가셨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누나와 나는 새벽에 문을 밖에서 잠그고 나가시는 발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아침이면 방 윗목에 차려 두신 밥을 먹고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돌아오시는 부모님을 맞곤 했다.

  그렇게 성실히 살던 두 분은 내가 초등학교를 마치기 전 우유 대리점을 인수하셨다. 우리는 사글세 단칸방을 떠나 우유 대리점 2층으로 이사했다. 부모님은 1층 가게에 붙은 작은 방을, 누나와 나는 2층을 썼다.

첫 신앙, 그리고 교회에서 멀어진 시간
  이사한 지 오래지 않아 할머니와 막내 고모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집이 조금 자리를 잡은 것을 기뻐한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기로 하신 것이다.

  할머니 집은 보광동 81번 버스 종점 위, 중소기업은행에서 언덕을 꺾어 올라가는 골목이었다. 개미굴처럼 구불구불해 동네 사람이 아니면 길을 모를 정도였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그 골목을 누비다 보면, 할머니 집 앞에 들러 사탕이나 간식을 얻어먹곤 했다. 치마 속 속곳에 고이 넣어 두셨던 꼬깃한 종이돈을 꺼내 용돈을 쥐여 주실 때, 쪼글쪼글한 작은 손의 온기가 그렇게 따뜻했다.

  그러나 나는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집가지 않은 막내 고모까지 함께 살아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할머니가 교회를 다니신다는 사실도 함께 살고 나서야 알았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할머니는 나를 전도하셨다. “동환아, 교회 가면 차비랑 용돈 줄 테니 같이 갈래?”

  부모님은 교회와 거리가 멀었고 전도도 잘 먹히지 않았다. 할머니는 손자인 나를 붙잡으신 것이다. 충무로의 충현교회를 다니셨던 할머니는 내가 다닐 버스비와 간식비를 넉넉히 챙겨 초청하셨다. 다행히 또래 사촌도 그 교회에 다니고 있어 어렵지 않게 따라나섰다.

  교회는 내게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주일학교 성경 공부도 좋았고, 예쁜 선생님도 좋았다. 예배가 끝나면 친구들과 오락실에 들러 겔로그, 테트리스를 하며 놀았다. 차비까지 다 써버려 충무로에서 남산을 넘어 보광동까지 걸어오기도 했다.

  그런데 중학교에 갈 무렵, 버스를 타고 교회 가는 일이 점점 부담스러워졌다. 무엇보다 부모님은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다. 나 혼자 교회를 다니는 게 마치 부모님을 배신하는 듯 느껴졌다.

특히 할머니와 부모님 사이에 작은 다툼이라도 생기면 그 마음은 더 깊어 졌다. “교회를 안 다니니 저렇지…”라는 할머니의 말이라도 새어 나오면, 어린 나는 괜히 엄마 아빠 편에 서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도 표 내지 않으셨지만 불편해 하셨다. ‘우린 교회도 안 가는데, 시어머니가 손주를 끌고 다니네’ 하는 눈빛이 느껴졌다.

  머리가 커가고 집안의 묘한 종교 긴장 속에서,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며 교회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교회에서 멀어졌다.

우진연립으로 이사—들려오던 성경 소리
86 아시안게임이 끝난 무렵, 우리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이태원 이슬람사원 옆, 이층으로 된 오래된 우진연립이었다. 하지만 이집은 방이 세 칸이나 되었고 무엇보다 내 방이 생겼다.

아버지 어머니는 현관 옆방, 할머니와 누나는 안방, 나는 부엌 옆방을 썼다. 그 즈음부터 할머니 방에서는 성경 읽는 소리, 기도 소리, 찬송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학교 가려고 문을 나설 때도, 저녁에 독서실 가려 옷을 갈아입으러 들렀을 때도, 할머니는 늘 낮은 상을 펴고 성경을 읽고 계셨다. 새벽예배 나가시기 어려우니 집을 성전 삼아 기도와 말씀을 이어가셨다.

문맹에서 성경을 독학한 믿음
이사하고 오래지 않아 할머니는 팔순을 지내시고 걸어서 다닐 수 있는 동네의 한광교회로 옮기셨다. 그 교회에도 “성경 다독대회”가 있었다. 할머니는 매해 연말, 어김없이 상을 받으셨다. 사실 충현교회를 다니실 때도 매년 성경다독대회가 있었다고 하는데 할머니 또래 중에서는 늘 1,2,3등을 놓치지 않으셨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소학교도 다니지 못한 문맹이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뒤 성경을 읽기 위해 스스로 한글을 깨우치셨다.

  할머니가 소천하신 뒤 익산 선산으로 가는 버스에서, 한광교회 담임목사님이 내 옆에 앉아 말씀하셨다. “할머님은 그 또래에서 따라올 이가 없는 성경 다독 1등이셨습니다. 그리고 늘 장손과 손녀, 아드님과 며느님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평생 주님과 동행하려 애쓰신 성경 읽기와 기도는 훗날 내가 사역자의 길을 걷는 큰 밑거름이 되었고, 부모님이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거듭남의 삶을 사는 데도 씨앗이 되었다.

이 땅에서 우리 가정이 신앙 안에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지는 못하셨지만, 그치지 않았던 기도는 결국 우리 가족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 되었다.

우리 집에 임한 은혜—가족 구원의 이야기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21년 전 소위 “불신 결혼” 즉 믿지 않는 가정과 결혼했다. 이 불신 가정의 종교는 좀 복잡했다. 시어머니는 불교신자, 아버님은 가끔 성당에 다니셨고, 30년 간의 고부갈등으로 며느리가 교회라면 고개도 돌리고 싶지 않게 하신 시할머님은 신실한 기도의 용사, 권사님이셨다.

  처음 시집오신 어머니는 명절이나 기일에 제사도 안 지내는 것이 근본도 없는 듯 못마땅하여 아무도 시키지도 않는 제사상을 차리고 아버님을 설득해서 예를 드리셨다고 한다. 내가 이 집에 며느리가 된 후 시할머니는 이 집에 자기 편이 처음 생긴 듯 늘 예뻐해 주셨고, 어머니는 위 아래로 예수쟁이들에게 둘러쌓여 불편하셨을 텐데 감사하게도 나를 제사 예에서 빼 주셨다.

  할머님은 95세가 넘어 그 생을 다하실 때, 할렐루야를 외치며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높이 들고 소천하셨고, 주의 종이 되었다고 늘 자랑스러워하시던 장손이 꼭 들어와 장을 치러달라고 유언을 남기셨다. 그 후, 6-7년 전에 시댁에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해결이 쉽지 않은 일이라 모두 당황스러웠지만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씩을 모두 주님 앞에 무릎 꿇게 하셨다. 이글은 아내가 늦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된 두 분 부모님을 보면서 쓴 글이다. 

  세상에 기적도 많지만 불신 가정이었던 시댁 식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언제 생각해도 놀라운 주의 역사이다. 나는 두 분의 신앙이 성숙해져 가시는 것을 보면 늘 숙연해진다. 믿는 가정에서 온 며느리라고 자랑할 게 하나도 없고 도리어 이런 것이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는 것이구나, 가슴이 먹먹해지며 은혜로 눈물이 핑 돌 때가 많다.

  아버님은 나이가 많이 드셔 교회를 다니셔서 집사님으로 은퇴하셨지만, 그 집사님의 성경책은 아침저녁으로 손과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매일 저녁 8시면 하루도 빠짐없이 가정예배를 드리신다. 누가 이 분을 초신자라 하겠는가.

  워낙 말씀이 없으신 분이지만 가정예배를 인도하실 때에는 그 어느 목회자 못지 않게 힘 있게 진리를 선포하신다. 나는 이 분을 참으로 존경한다.

교회라는 소리도 꺼내지 말라던 어머니는, 그 사랑하는 아들이 주의 종이 되자 “이제는 나도 하나님이 부르시려나” 농담하셨다. 주님은 실제로 그분을 만나 주셨다. 가정 안에 어려운 일을 당해 먼 친척의 손에 이끌려 난생처음 기도원에 발을 들인 순간,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자기도 모르게 무릎 꿇고 통곡으로 회개하셨다고 한다. 지금은 명예권사님이 되셨다.

  우리 어머니의 교회 사랑, 전도 열정은 참 드물다. 교회가 무조건 좋아서가 아니다. 지금까지 세상 속에서 살아와 교회 일이라면 아무것도 모르니 목사님이, 성경책이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다는 굳건한 의지에서 나온다.

많이 배우지는 못하셨지만 세상에서 경력과 능력으로 인정받으셨던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하신 말씀이 잊히지 않는다. ‘교회 안에 들어와 보니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들이, 상식을 모르는 사람들이,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더구나…’ 그래도 그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사랑하신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낮은 모습으로 섬기신다. 본인은 이제 초신자이니 배운 대로 하는 게 정답이란다. 나는 이 초신자 명예권사님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말씀과 예배에 정답을 아시는 아버님, 교회 봉사와 전도에 정답을 아시는 어머님. 나는 이 두 분에게서 가장 중요한 기본을 다시 배운다. 이분들의 기도에 빚을 입고 살아간다.

무대와 방랑—연극·방송·유랑의 시간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교회를 잊고 살았다. 재수까지 하며 들어간 서울예술전문대학(현 서울예대)은 열정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예수님을 가까이하기엔 내 앞에 유혹이 많았다.

졸업하자마자 창단 극단 ‘수레무대’에 들어갔다. 6개월 단기 군복무를 포함해 3년 동안 전국을 유랑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부터 결혼 후 26년째 고향을 떠나 사는 선교사의 삶을 훈련받고 있었던 셈이다. 케이블 방송 개국 시기에 GTV와 대교방송에서 FD로도 일했다.

예배당의 결혼식—“오 해피 데이”
  그 무렵 누나의 직장 동료였던 지금의 아내, 김연범을 만나 짧은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누나 친구와 사귀는 일은 당시 쉽지 않았기에 비밀 연애를 몇 달 하고는 서둘러 결혼했다.

  식장을 급히 정해야 할 때, 아내의 초등학교 친구 수미가 연락해 자신이 출석하는 갈보리교회에서 할 수 있게 돕겠다고 했다. 교회를 다니지 않던 내게는 엉뚱한 제안 같았지만, 비용도 절약되고 새 삶을 빨리 시작할 수 있어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우리의 결혼식은 삼성동 갈보리교회에서 박조준 목사의 주례로 열렸다.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는 연극을 같이하는 후배인 김지영이 불러온OB 합창단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이 팀이 부른 결혼식 축가는 바로 “오 해피 데이”였다. 찬송가 한 곡 뒤 갑자기 터져 나온 경쾌한 리듬에 예배당이 환해졌고 주례를 하시던 박조준 목사님은 당황해 하셨다. 그렇게 우리의 결혼식은 끝났다. 

지금도 아이들이 교회에서 결혼하길 바란다. 지금도 가끔 꺼내 보는 결혼식 사진 속 십자가와 목사님의 얼굴이 신앙의 길을 잊지 않게 해 주는 표지판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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